“티끌과 대들보 이야기” 마태 7:1-6, 50, 487
한국은 지금 대통령 선거철이 다가 왔다. 각종 미디어에서 쏟아내는 뉴스, 유튜브, 개인의 SNS 등에는 상대방을 비방하는 수 많은 말들이 나온다. 상대방이 한 말들, 작은 실수들을 파 헤치고, 꼬투리잡고, 비난한다. 때로는 분명히 상당방이 좋은 의도로 말했음에도 상대방을 깍아 내리기 위해서 억지로 부정적으로 해석하며 비판한다. 그 외에도 유명인들이 한 말들의 앞뒤를 짜르고, 그들이 한 작은 말이나 실수를 분석하고 공격한다. 그런 일들을 보면, 얼굴이 뜨겁다. 한국의 정치는 언제 좀 성숙해질까 염려된다.
그런데, 그런 일이 현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았다. 그런 모습들이 그 당시 사회를 지배하였고,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본문에서 주님은 세번에 걸쳐서 매우 중요한 동사를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교훈해 주셨다.
1. “하지 말라”
* 목적어: 1절,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 사람의 눈의 구조는 앞을 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상대방을 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런 사람이 상대방의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타인의 눈의 티끌을 찾지 말라. 사람이 작은 티끌, 단점, 작은 죄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매우 열심히찾아야 보인다. 특히, 눈 속에 숨은 작은 티끌은 전문적인 안과의사의 눈으로찾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남의 잘못이나, 문제점을 <전문가> 처럼 잘 찾아낸다.
* 예) 법정에서 검사가 피의자의 잘못과 죄들을 열심히 <전문적으로> 찾고, 증거를 찾아서 범인임을 확인하듯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그렇게 잘 전문적으로 찾아내고 정죄한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다른 사람에 관해서 흉보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 이것은 유대인들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5절, “외식하는 자여”-> 유대 율법주의, 외식주의를 지적한다.
-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 율법으로 항상 다른 사람들의 작은 허물과 죄들을 열심히 찾아내고 정죄했다.
- 주님은 그 유대 율법주의자들에게 율법으로 타인의 작은 잘못을 지적하고 정죄하는 것을 금하신다.
- 또한, 그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에게도 적용해야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 오래 하면, 이것 하지 말라, 저것 하지 말라, 이렇게 해서는 않된다. 저렇게 해서는 않된다. 그런 것이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것이 이미 우리 마음의 판단의 잣대, 율법이 되어서 사람들을 판단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있는 율법, 자신 만의 해석,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지식으로 다른 사람의 성품, 태도 등에 있어서 작은 허물이나 잘못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2. “어찌하여, 못하느냐?”
* 목적어: 3절, 어찌하여 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건물의 기초석) 를 보지 못하느냐?
4절, 어찌하여 다른 사람에게 눈의 티를 빼라고 할 수 있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작은 것 가지고, 그것이 옳으니 틀리느니, 논쟁하고, 지적하지만, 정작 너는 너의 심각한 문제점을 모르느냐?
안식일에 10리 가는 것은 되고, 11리를 가면 죽을 죄를 진 것 처럼 지적하고, 정죄하고, 안식일에 우물에 빠진 동물을 놓고 구해 주는 것이 옳으냐 버려 두는 것이 옳으냐 논쟁하며 싸우누냐?
그런 문제로 화내고, 지적하고, 정죄하느냐?
이 말씀은 1차적으로 율법의 작은 것 하나까지 따지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이지만, 또한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이다.
- 김수영 시인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축약했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에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나는 왜 분개하는가?...
나는 왜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지 못하면서… 몇십원 짜리 때문에 증오하는가?
* 그것은 유대인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그런 편협함과 이기주의가 내재해 있다.
* 사람은 어찌하여 타인의 작은 티글/ 작은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교훈하는 것을 좋아할까?
사람은 어찌하여 자신에게 있는 들보/ 큰 문제점을 보지 못할까?
* 우리 모두에게 그런 문제점들이 조금씩 있지요? 저도 결코 이 “어찌하여”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니, 사실, 나도 나이가 들어 가면서 점점 말많은 꼰대가 되어 가지 않을까 두렵다.
* 특히, 사람들은 자신이 훈계자의 입장/ 자신이 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자녀들, 아내, 친구, 타인에게 대단히 야단치듯이 말한다.
* 한국에는 두 마리의 개 이야기가 있다.
중국에는 고사성어: 지우책인명: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도 남을 나무라는 데는 총명하다'
- 정치판: 말 한마디를 꼬투리잡고, 공격하고, 서로를 향하여 …. 무섭게 공격한다. 좌파, 우파…
.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역사적인 사실도 필요없고, 공신력있는 언론사의 기사도 필요없고, 논리도 필요없다. 오직 자신의 감정적인 결론만 있을 뿐이다. 정치판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그런 모습들이 조금씩 있다.
우리는 “어찌하여”, 자신의 모습은 돌아보지 않고, 상대방의 결점만 보고 비방, 공격하는지 모르겠다.
누가 착한 사람일까? 나에게도 문제점이 있을꺼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누가 훌륭한 사람인가? 나에게는 문제점이 참 많아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3. “먼저, 하라”
5절,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
목적어: “네 눈 속의 들보를 빼어라” 먼저 … “네 눈 속의 들보를 빼어라”
** 1) 먼저 자신을 돌아 보아라.
- 다른 사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공격하기 보다, 네 자신을 ‘먼저’ 돌아 보아라.
* 먼저, 나를 돌아 보는 것,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눈은 앞을 보고, 타인을 보기 위해 달려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타인의 잘못을 보고 판단하게 된다.
* 내가 나를 보려면 거울을 통해서 나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하루에 몇번 거울을 보는가?
하루에 3번? 많이 보면 10번?, 그래도, 하루 동안 우리가 보는 것의 몇 퍼센트가 될까?
* 성도에게 있어서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은 무엇인가?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을 비추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를 비추어 보아야 한다.
* 자신을 돌아보아서, 내 속에 있는 심각한 문제점, 중요한 과오가 있음을 발견하고 깨닿아라.
그리고, 그것을 제거하기를 애써라.
** 2) 소중한 것, 본질적인 것을 먼저 지켜라.
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개, 돼지는 무엇인가? 유대주의 율법주의를 말한다. 작은 율법 하나하나 따지고, 별로 중요하지 않는 해석문제로 논쟁하고, 상처주고, 영혼을 파괴하고 정죄하는 것은, 진주를 돼지에게 주는 것과 같다.
거룩한 것, 진주는 무엇인가? 신앙의 가장 고귀한 것, 본질적인 것: 믿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자칫 잘못, 작고 졸열한 율법적인 판단으로, 가장 귀중한 신앙의 본질을 잃지 말고, 영생의 문제를 다치지 않게 하라.
결: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감싸주기 위해서 우리의 죄악 대신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시고, 창에 찔림을 당하시고 죽으셨다.
티글만큼도 가치없는 우리를 위한 주님께서는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셨다.
주님의 십자가, 주님의 고귀한 은혜와 사랑, 영원한 생명,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주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 서로를 이해해 주고 감싸주어서 천하보다 고귀한 생명을 구하는 우리가 되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