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중에도 기뻐해야 합니까? 빌 2:17,18 2016 미시아나한인교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슬픔을 당하면 같이 울어주고, 기쁨을 당하면 기뻐해 주는 것이 일반적인 이치다.
그래서, 한국 장례식에 가면 엄청 같이 울어 준다. 같이 울어주면, 그것이 그 가정에 위로가 되기도 한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15에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Rejoice with those who rejoice; mourn with those who mourn.” 고 하였다.
그런데, 한 젊은 목사가 어떤 성도님의 장례식에 가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고인의 영혼을 품에 안아 주셔서 감사 합니다. 천국으로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그 유가족이 화가 났다. “아니. 사람이 죽었는데 감사하다, 망언도 유분수지”라고 화냄, 사표…
이전에 섬기던 담임목사님의 조언: "장례식에 가보면, 어떤 목사는 감사라는 말을 버릇처럼 사용한다. 장례식에서 감사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 말을 듣고 이렇게 기도한다 "고인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가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라" mourn with those who mourn 는 말을 하였지만, 자신의 장례식에 관해서는 “기뻐해 달라”고 말한다.
본문: 바울은 자신을 관제로 드린다고 말하는데, 이 관제는 고대에 희생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의식을 말하는데, 바로 바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말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이제 곧 순교의 피를 흘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처형되어도 “나는 정말 기쁘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기뻐해 달라. 축하해 달라고 말한다.
이런 말이 이해가 됩니까? 우리의 믿음이 어느 정도까지 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그냥 한번 하는 소리가 아닌 것 같다. 17, 18절에 보면 기쁨(glad, rejoice) 라는 말이 4번 나온다.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리라” I am glad and rejoice with all of you. So you too should be glad and rejoice with me.”
그냥 한번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소리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믿음으로 담대할 수 있을까요? 죽음으로 내몰리는 순간에도 기뻐할 수 있을까요? 절망의 순간에도 하얗게 웃을 수 있을까요?
정말 그 정도의 믿음까지 되면 좋겠다. 무엇이 바울로 하여금 불 같은 시련 속에서, 죽음 앞에서도 기쁘다고 말하는지 같이 생각해 보겠다.
바울이 시련과 죽음 앞에서 웃을 수 있는 그 힘의 원천은 바로…
1. 하나님 때문이다. 바울은 주님 때문에 시련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
(빌 1:18)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The important thing is that in every way, Christ is preached. And because of this I rejoice. Yes, and I will continue to rejoice,”
- 사도 바울은 어떤 어려움을 당하든지, 시련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원했고, 죽으면 하나님께 소망이 있기에, 죽음 앞에서도 기뻐한다고 말한다.
* 모든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지난 주, 창조 후 가장 먼저 표현된 말은 감탄사였다고 했는데, 최초로 표출된 감정은 “기쁨”의 감정이다.
(창 Genesis 1:4) 창조 후 “보시기에 좋았더라” 7번 나온다.
천지창조 후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상상된다.
- 모든 “기쁨, 즐거움”의 감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기쁨의 근원이다.
시 Psalms 16:11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
“ you will fill me with joy in your presence, with eternal pleasures at your right hand.”
*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
- (시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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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옛날 시장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어머니의 등에 메달려 평온하게 잠자는 어린 아이를 보았다. 아이에게 세상의 소음, 싸움질,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어머니만 있으면 된다.
- 우리 하나님은 만유보다 크시다. 우리는 그 크신 하나님의 품 안에 있기에, 어떤 상황하에서도 주님만 있으면 기뻐해야 한다.
2. 기쁨은 시련을 이기는 힘이 있기에 시련 중에 기뻐한다.
빌립보서는 로마 감옥에서 죽음의 사자가 문밖에서 기다리는 중에 기록했는데, 이 빌립보서에는 “기쁨”, 즐거움” 이런 류의 단어가 매우 많이 나온다. 마치 기쁨의 대 서사시를 쓰면서 큰 축제를 벌리는 것 같다.
바울은 왜 시련 중에 기뻐하라고 하는가?
(빌 4:4,7)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Philippians 4:4,7) “[4] 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7] And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 will guard your hearts and your minds in Christ Jesus.”
* 시련 고난 속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요 시련을 이기는 비결이다.
- 성도는 상황이 좋아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기뻐하면 시련을 이긴다.
- 시련 속에 울고 슬퍼하고 우울해하는 것은 아무런 답이 없다. 오히려 더 슬프고 절망되게 한다.
- 기쁨은 밀물과 같고, 슬픔은 썰물과 같다. 기쁨이 밀고 들어오면 슬픔은 밀려서 나간다.
- 기쁨은 항생제이다. 기쁨이 있는 것에는 절망, 낙담, 실패, 고난 같은 병균들이 자리 잡을 수 없다.
- 기쁨이 있는 곳에는 불행이 발을 붙이지 못한다. 기쁨은 불행을 도망가게 만든다.
* 지난 주 김정운 교수: “울면 슬퍼지고, 울 일이 생기고, 감탄하면 감탄할 일이 생긴다.”
- 좋은 일이 있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
- 그래서 느 Nehemiah 8:10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
- 시인 정용철 “기쁨의 기술”: 옛날도 좋았는데 지금은 더 좋구나. 지금도 좋지만 내일은 더 좋을거야. 비 오는 날은 촉촉해서 좋고 갠날은 맑아서 좋구나. 아이 는 순수해서 좋고 어른이 되어서는 지혜로워서 좋구나. 갈 때는 새로운 것을 보아서 좋고 올 때는 그리운 것을 만나서 좋구나. 아픔이 지나가면 기쁨이 오고 기쁨이 모이면 아픔도 이길꺼야. 특히 마지막이 너무 좋다 “기쁨이 모이면 아픔도 이길꺼야
결: 바울은 빌 4:4 주 안에서 항상(슬플 때나 아플 때나, slow business)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무조건 기뻐하라고 말한다. 내 마음에 기쁨이 차 오르기를 기다리지 말고, 지금 기뻐하라는 것이다.
내 상황이 웃는 상황이 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신실하신 주님을 믿고 먼저 기뻐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내가 행복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뻐하면 행복해 지는 것이다. 행복은 기뻐하는 자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다. 시련을 당해도 믿음으로 기뻐하셔서, 축복을 부르는 성도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