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언5, “하나님께서 목 말라 하시다”, 요 19:28-30, 강인국목사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저는 어렸을
때, 저의 어머니를 철인으로 생각한 적이 있다. 저의 어머니는 온 종일 일해도 피곤치 않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 고프지 않고,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철인같았다. 그것은 하루 종일 일하고, 자녀들을 먼저 먹이고, 자녀를 위해 생명도 두려워하지 않는 어머니를
보았기 때문이리라.
순교자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들은 사자의 밥이 되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목 베임을 당해도 믿음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들은 감정도
없고, 신경세포도 우리와 달라서 아픈 것도 모르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천사같은 존재, 나와는 다른 사람들로 생각할 때도 있다.
특히,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분, 어떤
두려움도 없는 분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왜? 그는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는 하나님 그분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정말 그럴까?
본문: 예수님은 잡히신 후에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로마병정들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고문하면서 예수님의 연약한 피부를
사정없이 찢어 놓았다. 주님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다. 예수님은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혔고, 높은 십자가에 메달려서
피는 계속 흘려 내렸다. 예수님은 대량의 피를 흘리며 수분이 빠져 나가므로 말미암아 목이 말랐다. 목이 타 들어간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다.
이 짧은 주님의 외침과 그 외침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자.
1.
성경이 말하는
계시적 의미:
28절, 예수님께서 성경에 응하게
하시려고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다고 적고 있다.
시편 69편은 다윗이
시련 중에 기록한 고난 받는 메시야 시이다.
5절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나이다”,
21절, “저희가 내가 목마를 때에 식초(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나이다”
주님은 이 성경의 예언이 성취됨을 선포하시며 “나는 목마르다”고 하셨던 것이다.
2. 주님은 고통의 순간에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심을 알 수 있다.
우리도, 때로는 봉사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살아 보겠다고 결심한다. 하지만, 어떤
어려움이 생기고 마음이 상하면, “나 이제 이것 안할래…” 하며.. 그냥 하던 봉사 일은 그만둔다.
하지만, 주님은 그토록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순간.. 정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원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사역의 목적,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우리가 성도라면, 자신의
감정, 처지, 기분에 따르지 말고, 우리도 주님처럼 살기를 노력해야 한다.
3.
이 외침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통을 표현한 말씀이다.
* 예수님의
품성에는 신성(하나님의 성품)과 인성(사람의 성품)이 있다.
- 예수님은 신성: 예수님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할 수 있으시다. 예수님은 천군천사를 보내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병정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고, 십자가에서 얼마든지 내려 올 수 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어떤 해로움도 제거하고 이길 수 있으시다.
- 예수님의
인성: 예수님은 사람처럼 육체를 가지시고, 육체의 한계를
가지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작은 핏덩어리로 태어 나셨고, 연약한
어린이로 살면서 질병에도 걸리셨고, 넘어져서 무릎에 상채기가 생기도 하셨고, 사람처럼 피곤해 하셨고, 배고파 하셨고, 목말라 하셨다.
예수님은 고통을 당할 때에, 자신에게
있는 신적능력을 이용해서 극복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 모든 육체적 고통들을 자신의 몸으로
직접 경험하고.., 이해하고.., 감내해 내셨다.
* 그 사실을
깊이 깨달은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한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속에 거하시고, 사람들과 함께 거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당하는 모든 고통과 인간의 연약함을 다 경험해 보셨다.
* 천사나 영적
존재는 배고픔이나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주님은
목마름 조차도 참지 못하는 지극히 당연한 사람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계신다.
* 예수님은
하나님시지만 또한,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무쇠 인간이 아니시다.
그는 또한, 완전한 사람이시다. 목 마름은 다른
고난에 비하면 작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님은 작은 목마름 조차도 견디기 어려워서 신음하시고 고통하시는
사람이시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온 몸의 세포와 신경이 외부의 자극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스트레스로 힘들어 하시고, 두려워 하시고, 손가락 밑에 작은 가시에도 아파하시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시다.
하물며, 예수님께서 납이 달린 채찍에 맞으실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손가락처럼 긴 가시가 살갖을 파고들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손과
발에 쇠 못이 박힐 때 그 아픔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까? 십자가에 장장 6시간 메달려 있을 때 얼마나 두렵고 고통스러웠을까?
*
그렇게 주님께서
사람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당해 보셨기에,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시고 공감해 주신다.
히 5: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주님은, 우리가 연약함으로 죄악에
빠지고 비열하고 조잡한 마음을 가질 때도, 주님은 우리를 미워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가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때에 안타까이 여겨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우리를 용납해 주신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시고,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서 극한의 저주를 받으셨다. 그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함을 입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영화 벤허(1959년) 예수님이 주인공이 아니지만, 주인공의 삶을 뒤에서 말없이 인도하시는
주님의 섭리와 사랑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님의 얼굴은
나오지 않고 뒷 모습만 나온다.
감상 후: 벤허는 예수님이 주신
물을 받아 마셨다. 하지만, 벤허가 준 물을 주님은 마시지
못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조금도 주님을 이롭게 하지 못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결: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고, 자신의 몸으로 우리가 당해야
하는 모든 고통과 저주를 다 당해 주셨다.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셔서 마시게 해 주셨고, 우리는 생명을 얻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잠 25: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며 우리는 한 방울의 물이라도 주님의 목마름을
해소시키는 성도가 되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