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과 두려움을 이긴 찬란한 부활” 2022 부활주일, 눅 24:1-12, 강인국목사
혹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활을 설명하고, 부활을 믿게 해 보려고 애를 써 본적이 있는가? 아무리 설명해 보지만, 부활을 믿지 않던 사람이 부활을 믿겠다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부활은
각 시대의 각 사람들에게 수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켜 왔다.
불신자들은 부활은 거짓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화이다, 정신의 부활이다 등등 부활을 부정하는 주장들이 수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있어왔다. 특히, 현대는 어떤 시대보다 과학과 지식이 발달되어 있어서 이 부활의
사실을 믿지 못하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 그 부활의 논쟁의 정점인 부활의 현장으로 가 보자.
본문의 등장인물: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르던 남자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들은 아무도 무덤에 오지
않고 여자들이 왔다. 남자들은 ??
본문은 성경에서 여인들의 활약이 가장 돋보인다. 지구상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했다.
그 여인들의 이름이 10절에 나온다.
10절,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저희와 함께한 다른 여자들”: 적어도 5명 이상…. 누가는
그 이름들을 분명히 기록한다.
누가는, 역사가적 안목을 가진 사람,
그는 기록을 분명히 남기기 원했다. 이 말은? “여러분들이여
부활은 진실입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 이 여인들의 마음과 삶의 자세를 들여다 보자.
1) 이 여인들은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른 새벽: 그들은 밤에 잠자지 못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했을 것이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4절 “근심하였다”, 그 이전에는
마가복음에 보면 “누가 우리를 위하여 이 무덤 문에서 돌을 굴러 주리요”라며 걱정한다. 그것만 걱정했겠는가?
아직 어둡다, 전깃불도 없다, 위험하다!!(여인들에게 가장 큰 잇슈: 치안,
강도, 로마병정, 들짐승).., 게다가 성 밖의 먼 거리이다. 결코 활동하기 편안 시간대나
장소가 아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면, 보통 걱정만 하고 탁상공론만 하다가 그만둔다.
그런데, 그 여인들은 그들은 생각과 걱정만 하지 않았다. 각종 장애물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어둡고 두려운
무덤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걱정을 하는 대신 그냥 단순하게 행동으로 옮겼다.
2) 이 여인들은 믿음과 사랑의 사람들이었다.
5절 “여자들이 두려워했다” 우선, 어두운 상태에 공동묘지에 가는 것이 쉬운 일인가? 무덤 자체에 대한
두려움들(지금 정원처럼 다듬어진 묘지가 아니다). 치안부재, 무덤가: 두려움이 몇 배가 된다.
그들은 그곳에 가는 목적?
1절,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 주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고 수의를 입히기 위한 것이다. 참혹하게 찢어지고 싸늘한
시체에게 향품을 바르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사랑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 믿음은 두려움도 이기게 한다. 요일 5:4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 사랑은 두려움도 이기게 한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3)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들을 부활의 메신저로 삼으셨다.
여인들이 무덤에 들어 갔을 때, 두 사람(천사, 예수님?)이 여인들에게 부활의 사실을 전한다.
8절, “저희가(여인들)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 여인들은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가서 전했다. 부활의 증인의 모습이다.
사실 쉬울까? 죽은
사람이 살아 났다고 하면? 누가 믿어, 헛것을 보았다. 미쳤다고 손가락질 당한다.
그런데, 그 여인들은 본 것을 단순하게 그대로 전했다. 단순, 순수하게 믿는 여인들의 일반적인 특성일까?
* 반면에 제자들? 11절,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 일단 의심,
불신하고 보는, 남자들의 일반적인 특성일까? 제자들은
의심하고 허탄하게 생각했기에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첫번 증인이 되지 못했다. 남녀의 특성이라고 구별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 여인들과 같이 행동하고, 믿음으로 나가고 있고, 단순하고 순수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에 의해 확장되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 여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 비전이 있고 생명력이 있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일으킨다.
* 사실, 여인들이 처음부터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무덤으로 간 것은 아니다.
1절, 여인들은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다” -> 시체에 바르는 향품을 가지고 갔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실것이라고는 기대하지도 못했다는 말이다. 어두운 새벽, 조용한
시간, 근심과 두려움의 시간에 갑자기 불꽃처럼 일어난 사건이다.
기적은
과감하게 행동할 때, 근심과 두려움을 깨고 일어난다.
기적은 믿음으로 나갈 때, 어둠과 절망을 깨고 일어난다.
기적은 단순하고 순수하게 복음을 믿고 따르고 증거할 때, 슬픔과 일반 상식을 깨고 일어난다.
그리고 , 기적은 모든 것이 불 가능해 보여도 부활의 주님을 믿을 때, 의심과 불심을 깨고 일어난다.
* 주님의 부활은 사람의 기대와 일반 상식을 초월하여 일어났다. 주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자연 법칙을 깨트린, 초자연적 사건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지 못한다. 하지만, 주님의
부활이 초자연적 사건이기에, 우리는 그 주님을 믿을 이유와 가치가 있다. 역설적이다.
항상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반적 사건을 우리는 믿지 않는다. 상식으로 얼마든지 이해가 되고
수긍이 되는 사건을 우리가 믿을 필요가 없다.
일반적인
사건은 “그냥 그렇구나”하고 끝낸다. 그것은 그냥 현실이요 우리의 일상이다.
하지만, 부활은 인간의 머리로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기에, 우리가 생명 바쳐서 믿을 가치가 있다.
부활은 자연의 일반 법칙을 부쉬 사건이기에 예수님의 우리의 구주로 믿는 것이다.
* 어떤 사람들은 그런다. “나는 믿을 수 없어요,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요” 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믿음 없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 생각한다.
하지만 마가복음 16:16, 예수님은 부활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는다고 하셨다.
부활의 사건을 마음으로부터 믿지 못할 때, 사람은 그 정죄와 진노의
감옥에서 해방될 수 없다.
** 부활의 증거가 무엇일까? 무엇을 더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할까?
1) 주님을 따르고, 주님의 죽음을 보았고,
주님의 부활을 보았다고 증거하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주님의 부활을 증명한다. 부활을
실제로 눈으로 보고 만져 본 사람들이 있는데 믿지 않으면?
주님의 부활을 실제로 보지 못하고서 생명을 바쳐 전파할 사람은 없다. 거짓을
위해 생명을 걸 사람은 없다.
2) 주일이 부활의 증거이다. 제자들이 친히 그들의 눈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만나지 못했다면, 오늘날 이 주일도 없다. 그들은 매
주일날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며, 성찬을 나누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주일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창조된 첫날인 것이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생명바쳐 믿을 사람은 없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예배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3) 제자들의 변한 태도가 주님의 부활을 증거한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자 모두들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도망을 가고,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했다는 소리를 들어도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사리기에 급급하던 그들이, 어떻게
돌연히 그들의 태도들이 변화되었는가?
그 겁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십자가를 피해서 도망가던 사람들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부활의
복음을 중심으로 전파하며 순교도 불사했다.
왜 그렇게 갑자기 죽음도 불사할 수 있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을까?
그 이유는 바로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그들의
손으로 직접 만졌기 때문이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에 더 이상 사망의 권세가 자신들을
해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자신들도 반드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진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릴 수 있어도, 거짓을
위해 생명을 버릴 사람은 없다.
결: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순간이 아니다. 결코
어두운 세계로의 참담한 여행이 아니다.
단지 새생명으로 들어가는 의식이요, 관문이요, 긴
잠일 뿐인 것 입니다. 누가 밤에 잠을 자면서 내가 내일 깰것인가? 말것인가? 두려워하면서 잠을 자는가?
아직도 죽음이 두렵습니까? 아직도 주님을 위해 행동하고 따르는 것을 주저하니까? 아직도 이기심을 버리는 것이 어렵습니까? 아직도 주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믿지 못하십니까?
혹시…, 그 모든 의심과 불순종의 원인이 부활을 분명히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