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이여…”, 요 21:1-1, 2022.4.24, 강인국목사, 49, 갈릴리 호숫가에서
오늘 부활절 후 두번 째 주일이다. 아직도 부활의 감격과 놀라움 속에 젖어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저는
이것을 aftershock of the resurrection(부활후의 여진) 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오늘
우리 교회는 오늘 예배 후에 일군선출이 있다. 오늘 본문은 부활절 직후의 사건들과 일군선출에 대한 교훈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 1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갈릴호수의 다른 이름)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그 후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러번 나타 나셨다.
본문 14절에 보면, 이 장면이 부활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 첫번째 나타나심: 요 20:19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두려움으로
문을 잠그고 있는 그때에, 부활하신 주님이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
두번째 나타나심: 요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과 도마도 함께 있을 때, 예수께서
오셔서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고 네 손으로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고 말씀해 주셨다.
**
사실, 주님은 부활 이후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시면서 10번 이상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약 600명의 사람들에게 자신을 보이셨다. 제자들은 왜 그것을 자세하게 기록할까?
그것은 부활은
사실이다. 우리가 헛 것을 본 것이 아니다. 나 혼자 본
것이 아니다. 혼자 착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우리 모두가 부활의 증인이다. 부활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
5절, 제자들이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예수님
“얘들아 물고기는 좀 잡았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절, 제자 요한이
주님이다 하니, 시몬 베드로가 바다로 뛰어 내려서 헤엄을 쳐서 주님께 왔다.
**
베드로: 본문의 주인공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 베드로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 제자라고 했지만, 실수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다. 치명적으로
어린 계집종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이었다.
본문에 보면, 베드로의 특성이 잘 나타난다. 그는 예수님이라는 말을 듣고 단번에
물 속으로 뛰어들어서 헤엄쳐서 주님께 왔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랐다. 그에게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그는 가슴이 원하면
물 속에라도 뛰어 들어거는 열심과 뜨거운 가슴이 있다.
**
그리고, 제자들은 물고기를 세어 보았다. 몇 마리? 11절, 153 마리. 모나미 볼펜으로 유명하다.
*
왜 물고기 숫자를 세어 보았을까? 그들은
이전에도 주님의 도움으로 많은 물고기를 잡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동안 한번도 물고기 숫자를 세어 보거나 기록에 남기지 않았다.
**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하나도 허투로 넘어가지 않는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니 온 세상이 달라졌다. 작은 것 하나도 예사로 지나가지 않는다.
그들은 예사로이 지나쳐 갈 수 있는 것도, 확인하고 의미를 파악하였다. 그들은 그런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겼고 부활의 진실성을 전하고 싶다.
**
예수님은 제자들과 음식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는다. 본문(15-17절)
- 예수님: 베드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파오) 하느냐?
. 베드로: 주여 그럽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필레오) 주께서 아시나이다
. 예수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 두번 같은 대화를 함.
- 세번 같은 질문을 하심 이번에는 “필레오” 하느냐?, 그랬더니
베드로 “근심하여 가로되…”
->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던 자신의 실수, 부족함이 생각남…”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 내 양을 먹이라
-> 목양의 사명, 목자의 사명, 목회적
사명…
* 단어와 의미 해석
1) 본문에 나오는 "사랑"이란 단어는, 원어에 보면 예수님은 아가페(숭고하고 희생적 사랑)를 물었고, 베드로는 필레오(형제, 이웃의 사랑)로 대답했다고 한다.
- 제가 젊을 때: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아가페와 필레오의 차이를 의미있게 설명했다.
. 주님은 우리에게 희생적으로 숭고하게 자신을 사랑하느냐 묻는데, 베드로는 형제로서 사랑할 자신 밖에 없어서 필레오로 대답했다는 것이다. 멋있는
해석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가페로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멋지고 은혜로운 해석이다.
- 그런데, 원어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들은 그것이 아니란다.
원어 전문 학자들의 해석:
아가페/ 필레오는 동의어로 사용했고, 다른 의미가
없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아가페와 필레오 에로스까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예수님 당시에는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아가페, 필레오, 에로스 등의 사랑의 의미는 그 이후 시대에 정립되었다고
한다. 나는 원어에 박식한 사람은 아니니, 그들의 주장을 따를 수 밖에 없다.
- 사실, 예수님과
베드로는 아람어로 ‘아하바’(사랑) 로 묻고 대답했다. 그런데, 요한은
헬라어로 다르게 기록하였다. 왜 다르게 기록했을까? 요한의
속 마음은 무엇일까? 천국에 가서 물어 볼 수 밖에…
2) “이 사람들보다”: 이것들
보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네가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로 해석해야 한다. 영어에서는these, 이것들이다.
* 그러면, 예수님의
이 세번의 물음과 “내 양을 먹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성도가 된다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도라면,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지 자신에게 묻고 또 묻고, 확인 또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 성도는 세상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목회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이유나 목적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교회 일군이 된다는 것은 세상 어떤 것 보다 주님을 따르고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이 분명하면, 우리가
사역 중에 어떤 불같은 시련과 고난이 와도 이길 수 있다.
** 베드로는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고 나서, 이 세상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마지막에 어떻게 죽게 되는지 말씀해 주신다.
18절, 젊어서는
복음을 전하려 다니고, 네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네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에 대한 해석 19절, 이
말씀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
예수님은 베드로도 십자가 죽음을 당할 것이다는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자가 주님과 같은 모양으로 십자가형을 받을 수 없다라며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결: 베드로는
실수도 많고, 혈기도 있었고, 공명심도 있었다. 하지만,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는 완전히 변화되어서 복음을
전하였다.
베드로는 결정적으로 세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으며
죽음을 두려워 했던 겁쟁이였다.
하지만, 베드로가
부활의 신앙을 가진 후에는, 세상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했고, 죽음도
불사하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용사였다.
오, 우리는
얼마나 베드로 보다 훨씬 더 연약합니까? 오, 우리는 얼마나
베드로보다 실수도 많고, 겁쟁이고, 공명심도 많은가요?
오, 그리고, 이 시대는 얼마나 죄악이 가득하고, 우리를 유혹하고 절망시키는 일이
많은지요?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분명히 소유하지 않고, 이 악한 시대를 이겨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주님보다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죽기까지 주님의 뒤를 따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부활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
우리는 진심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