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행복론(1)
사람은 행복이라는 단어가 생기기 전부터 행복을 추구했다. 행복에 대한 논제는 헬라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예수님 당시는 로마제국의 전성기로서 헬레니즘 문화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당시 세계에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가 대세였다.
특히, 예수님 300여년 전에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에 이르는 길’을 말하면서 행복이란 단어가 사람들의 두뇌 속에 심어졌다. 바로 그 후에 헬라의 철학계에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나타나서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논제로 다루면서, 이 행복이라는 명제가 헬라 사회 전체에 깊이 퍼져 나갔다.
예수님 100여년 전의 사람인 로마의 철학자 시세로가 ‘행복의 조건’에 관해서 말하면서 로마 제국의 사람들에게 행복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보편화 되었다. 그리고 로마의 철학자인 세네카는 예수님보다 2, 3년 먼저 태어났으며, 그는 네로의 유년 시절에 네로에게 문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그로 인하여 네로는 로마의 황제들 중에서 시를 잘 쓰고 음악을 좋아하고 예술을 좋아했던 황제들 중 하나였다. 세네카는 행복론으로 당대에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네로황제는 취임 초기에는 세네카의 조언을 통해서 꽤 사람들의 신임을 얻는 정치를 하였다. 하지만 로마제국에서 세네카의 명성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것을 경계한 네로황제는 세네카에서 반역죄를 덮어 씌워서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 네로는 본격적인 폭군의 길로 갔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멸시켰고, 결국 자신의 인생도 파멸시키고 말았다. 최악의 폭군이 최고의 문학가요 예술가라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의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세네카의 행복론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그런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고, 사람들에게 산상수훈을 설교하셨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 ‘복’이란 말을 헬라어로 마카리오이(makarioi)란 단어를 사용하셨다. 이 마카리오이는 당대의 철학자들이 사용하던 행복이라는 그 단어였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복이라는 단어는 율로게토스(eulogetos) 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경건한 용어인 율로케토스 대신에 당대의 일상적인 용어인 마카리오이를 사용하셨다. 이 말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단어로서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를 말씀해주기 원하셨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제국 전체에 퍼져있는 인간 본위의 행복론을 경계하셨고, 천국 백성이 추구해야 할 행복론을 정립해주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라틴어 성경에서는 그 단어를 좀 더 경건한 단어인 베아티투도(beatitude, 지복)로 번역하였고, 그 이후부터 좀 더 종교적인 단어이 복(bless)이란 말로 번역되어 내려오고 있다.
사실, 행복이라는 단어 자체는 다분히 인간 본위적인 단어이다. 행복이란 대체적으로 사람이 느끼는 주관적인 판단이고 개인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는 전적으로 인본적인 행복론이 대세이다. 현대인의 행복은 지극히 사람중심적이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가시적이고, 표면적이다.
과연 우리는 그렇게 잘못된 행복론에 깊이 빠져있는 것을 자각하고 있을까?
과연 우리에게는 그 깊은 수렁 같은 행복론에서 빠져 나오기 원하는 의지는 있는 것일까?
주님께서 인본적인 행복론을 추구하는 현대 신앙인들을 보시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팔복을 통해서 조금 생각해보기 원한다.
(강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