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행복론(4), 참된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종종 듣는다, “저 사람은 무슨
복이 많아서 저렇게 부자이지?” 특히 현대인들은
행복은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열심이다.
현대는 자본주의 경제시장
체제이기 때문에 물질이 없이는 살 수 없다. 이 사회는 물질에 의해서 굴러가고
유지된다. 돈이 있으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고 심지어 사람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 돈이 사람의
격을 만들기도 한다. 여인들이 매일 얼굴
맛사지를 받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카락에 웨이브를
주고, 명품 옷과 가방을 메고, 멋진 선글라스를 쓰고
비싼 자동차 안에 앉아 있으면
사람의 격이 달라 보인다. 한국에서는
비싼 차를 타고 호텔에 들어가면 벨보이들이 달려 나와서 반갑게 환영하는데,
경차가 들아가면 노골적으로 무시한다고
한다. 정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자동차의 가치로 그 안에 있는 사람의 가치도 다르게 평가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리를 해서라도 고급차를 구매한다.
미디어에서
쏟아져 나오는 광고들을 보라. 광고는 온갖 방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부추겨서 이것을 가져라, 저것을 가져라, 더 많이 가져라고
충동질한다. 미국은 바로 그런 시장경제 체제의 본산지이고, 우리는 그 미국에 산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런 것은 사람의 마음의 상태와 인격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예수님은 참된 행복은 물질의 소유에
있지 않고 사람의 인격에 달려 있음을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소유가 행복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어떤 존재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 사상가인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소유냐 존재냐>에서 소유 지향적인 삶과 존재 지향적인 삶에 대해서
말한다. 소유 지향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많은 것을 소유하기를 추구한다.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한 열정 때문에 이 사회에 계급이 형성되고, 서로
간의 갈등이 발생한다. 사람이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열정으로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한다. 사람은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애쓰다 보니 사회적 책임은 무시하고, 개인주의와 사회적인 갈등이 가속화된다. 소유 지향적인 사람은 소유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생산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소모적이고 파괴적이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소유하면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소유 지향적인
삶은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므로 불행을 부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은 존재 지향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존재
지향적인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존재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서로 공유하고 연대하며, 서로 조화하고 배려하며, 자신을 희생하여서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고, 내면과 정신의 삶을
귀중히 여긴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기독인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는 그의 책에서 성구를 많이 인용했다. 비기독교인이
이런 삶을 추구하니, 우리 기독교인은 더 크게 도전받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소유를 통한 행복보다, 나눔과 베품을 통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기독교는 무소유를 주장하는가? 예수님께서는 한 부자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마태 19:21)고 말씀하셨다. 우리 기독교는 무소유 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소유를 적극적으로 나누고, 자신이 가진 소유로
타인을 돌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자신의 소유를 나누면서 자신을 희생하는 법을 배우고,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을 통해서 참된 삶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사람이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대신 그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갈 때에 참된 행복이 있다.
(강인국목사, 2021.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