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시리즈4, 왜 힐링해야 하는가? 2 잠언 15:13 강인국목사 미시아나한인교회
지난주: 1.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마음에 방화벽을 만들어서 진리를 거부한다. 2.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믿음의 성장을 방해한다. 3.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원하신다.
4.
마음의
괴로움은 육신을 병들게 한다. (잠 17:22)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마음의 병이 육체를 병들게 하는 것은 현대인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미 수 천년 전에, 잠언서 기자가 사람의 마음과 육체의 병이 서로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았다는 사실은 놀랄만하다.
데이빗 벨굼 박사: 질병은 죄책감의 발로이다. 신체적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 중 75%가 정서적인 문제 때문에 병이 생겼다고 주장한다(씨맨즈, 상한 감정의 치유, p. 44).
스트레스는 신경계, 호르몬계, 면역계, 혈액순환계, 소화기계 등 모든 육체의 체계에 영향을 끼친다.
재물을 잃는 것은 적은 것을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은 것을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건강은 사람이 살아가는 날 동안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건강한 마음/평안/기쁨을
가져야 한다. “건강한 육신에 깃드는 건강한 마음”. 둘이 서로 상호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생명의 날 동안 건강해야
각자에게 맡겨주신 사명들을 잘 감당할 수 있다. 건강한 마음은 건강한 육체를 가져오고, 주어진
인생의 시간들을 더욱 보람차고 생기있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힐링은 마음과 육신 모두를 치유하는 전인적 치유이다.
5.
마음이 행복을 결정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A happy heart makes the face cheerful, but heartache crushes
the spirit. (Proverbs 15:13)
즐거운 마음은
얼굴을 밝게 만들고, 근심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말한다.
NIV 영어성경은 “마음의 즐거움”을 “행복한 마음” (A happy
heart)으로 번역한다.
마음이 행복하면, 얼굴에 생기가 돌고, 삶이 행복해 진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외부환경에 따라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불행해
하기도 한다. 하지만, 참된 행복은 주위환경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상태에 달려있다. 외부로부터
우겨쌈을 당하고 폭풍이 몰려온다고 할찌라도 내 마음이 편안함과 고요함을 잃지 않으면 그 사람은 행복한 것이다.
행복은 외부적
조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먹기에 달렸다.
고통의 순간일찌라도 마음을 잘 다스리면 행복해진다.
사람은 일생동안
불행한 사건들을 끊임없이 만난다. 하지만, 그런 고통의 순간에도
인간의 천부적 욕망이요 믿음의 정점인 행복으로 회복하는 것이 힐링이다.
6.
잘못된 신앙은 진리를 듣고서 오히려 공격하게 한다.
[52] …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53]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9] 돌로 스데반을 치니… (행 7:52-59)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연설이나 학설을 듣다가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그냥 무시하거나 잊어 버린다. 그런데, 신앙의 문제는 다르다. 왜곡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신앙이 지적되는 메시지를 들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지 못한다. 오히려 잘못된
신앙을 바르게 가르쳐 주는 사람을 미워하고 공격하기까지 한다.
스데반집사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고(행 6:8),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위대한 설교자였다(행 6:10).
스데반은
유대교 지도자들과 자신을 고소한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오신 메시야를 핍박하고 죽였다며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 말은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이 찔렸다. 하지만, 그들은 찔린 마음을 붙들고 회개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달려들어서 스데반을 성밖으로 끌어내어서 돌로 쳐서 죽였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신앙은 유대주의 전통과 편견에 묶여서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런
자신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는 스데반의 설교를 들을 때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회개하는 것 대신에 오히려 진리를 전하는 스데반을 향하여 격노하며 공격하였던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는 회개를 촉구하는 마음과 거부하는 마음이 서로 격렬히 싸우기 때문이다.
사람의 내면은
항상 영적 전투를 벌이고 있는 전쟁터이다. 특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죄악을 찾아서 영적 수술을 단행하려고 할 때는 그것을 거부하려는 육적 자아와 대접전을 벌이는 순간이다.
그럴 때, 빨리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면 마음이 편해지고 진리 안에서 새로워지게 된다. 하지만, 회개를 거절하고 진리를 거부하면 그 마음은 고통과 분노로
가득하게 된다.
진리의 말씀을
듣었는데 오히려 마음에 분노가 일어난다면, 자신의 마음이나 신앙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회개가 나오지 않고, 괴로움이 불일 듯
일어나면 자신의 마음이 병들었음을 알아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하였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범죄하고 타종교의
신을 섬기는 그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서 절규하며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원수보듯이 대하며 공격하였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타국의 군대에 의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 타종교의
술사들에게 죽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서 너무나 억울하고 참혹한
죽임을 당하였던 것이다.
현대교회에서
목사들도 목회현장에서 종종 경험하는 일이다.
목사가 부도덕에
대해 설교를 하면 비도덕적으로 산 사람은 괴로워서 견딜 수 없어한다.
설교자가
정직한 삶을 촉구하는 설교를 하면 부정직한 삶이 일상인 사람은 분노하며 설교자를 공격할 구실을 찾는다.
목사가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회개를 촉구하면 마음에 숨은 죄가 있는 사람은 목사를 향하여 눈빛이 달라지고, 원한을
품고 저격할 자세를 취한다.
- 이전교회: 제 설교시 가장 많이 눈물, 감동을
받은 사람 2-3 사람중에 드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날 나를 성토했다. 자신의 잘못된 신앙이 지적당했던 것이다.
어떤 무서운
죄를 진 죄인이라고 할찌라도 진리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왜곡된
신앙을 고쳐 주시고 병든 마음을 힐링해 주시고 괴로운 마음을 평안으로 채워 주신다.
사람의 마음이
진리를 잘 수용하고 회개하여서 구원에 이르게 만들어 가는 것이 힐링이다.
7.
마음은 인격이다.
(마 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눅 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주님께서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인격은 말과 행동으로 결정되는데, 말과 행동의 근원은 마음이다.
훌륭한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한다.
성도의 일생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선한 마음, 주님 닮은 마음을 만드는 것이 힐링의 과정이요 목표이다.
결: 우리는 아무도 내 마음은 언제나 잔잔한 호수요 평안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내 마음은 언제나 어떤 진리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사람은 없다.
내 마음은 하나님께서 들여다 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사람이 없다.
우리의 마음은 조금씩 병들어있고, 온갖 것에 상처받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을 통해서 내 마음에 작은 분노나 불편함이나 용서하지 못함이나.
괴로움이나 불행한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치유하여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 형상,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채워지기 원한다.
[이 게시물은 웹섬김…님에 의해 2019-03-08 06:07:26 주일예배설교 Sermon Webcast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