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용서, 그 일생의 숙제”, 마태 18:21-35, 강인국목사, 2024.9.29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지난 주간에는 본문을 묵상하고 준비하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용서를 설교할 수 있을까?
첫째는, 내 자신이 용서에 대한 자신이
없다. 내 마음에는 아직도 완전한 용서를 이루지 못한 것이 있다. 용서했다지만
마음 한곳에 미움이 있다. 어느날 그 기억을 떠올리면 잠 못드는 밤이 된다.
그리고, 아직 내가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도 있다. 그런데 용서하라 설교?
둘째는 이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문제이다.
사회에는 엄격한 법이 있다. 이 법
때문에 이 사회에 질서와 평화가 있다. 법을 지키기 위해서 강력한 징계가 있다. 그런데 모든 죄를 용서하라? 괜찮을까?
- 가해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데, 피해자가 용서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 일본인들은
매우 친절하고 예의가 바르다. 그런데, 한국인은 일본에게
자주 분노한다.
일본 정치계는 우익세력이 강력하다. 우익의
영향을 받은 정치인들은 자주 일본의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다. 합리화하고 자랑스러워 한다. 일본이 독일처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또 사죄한다면 한국인들은 끼어이 그들의 용서를 받아 들이고
강력한 우방국이 될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용서가 의미있을까?
- 정의
구현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용서가 의미가 있는가?
. 한국법의
약함: 한 남자가 여인과 데이트하다가 살해했다. 그런데, 형량이 3-5년, 이유는
술을 마셔서 정신미약상태, 우발적… 여인의 아버지의 절규, 이게 정의냐, 한국의 법이 내 딸을 죽였다.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고, 피해자는
일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용서하라고?
- 이
문제를 씨름하며 말씀을 준비했다. 오늘 메시지는 씨름으로 시작해서 씨름으로 끝날 수 있다.
*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용서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 이런
말들을 들었다. “나는 한번 아닌 것은 두번 다시 보지 않는다”, “나는
세번까지는 용서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나는 거짓말
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못한다”, “나는 나를 배신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는가?” - 여러분은?
* 예수님
당시 유대인 랍비들은 세 번까지는 용서하라고 교훈했다. 베드로도 그 가르침을 들었던 터라, 그는 넉넉하게 잡아서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느냐고 묻는다.
그에 대한 주님의 답변을 통해서 용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 22절, 주님께서는 일곱 번을 일흔번씩 용서하라고 말씀한다. 문자적으로 490번 용서를 말하는가? - 3번/7번
용서도 힘들다. 그런데 주님은 490번 용서하라신다. 7 완전숫자, 끝없이 용서하라신다.
- 끝없이
용서하라는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야 할까?
. 아이의 잘못을 무조건적으로 용서해 주면? 나쁜 버릇/
아이가 될 수 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될 수 있다.
법이 없는 무법가정, 깡패들의 천국, 도적의
소굴, 좀비 마약의 거리가 된다.
- 아무
겁없이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고, 반복적으로 악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용서가 괜찮을까?
. 예: 뉴스: 스토킹 범죄, 경찰에
도움 요청과 묵살, 결국 살인…
** 일곱번씩
일흔번을 용서하라는 말씀은….
1. 우리
일생 동안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용서는 성도가 짊어져야 할 일생의 숙제요 씨름이다.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은 보복과 응징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타인이 나에게 손해를 끼치면 반드시 되갚아 주고 응징해야 한다.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복수하는 영화가
인기있다. 친절한 금자씨, Taken같은 영화를 보면 통쾌? 비기독교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당연히 보복하기 원한다.
-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기에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기에, 이
말씀이 고민된다.
-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것 처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하신다.
- 우리는
이 기도문을 일생동안 암송한다. 성도는 일생동안 용서하기 애쓰고,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2. 용서는
사회법이 아니라, 성도 각자에게 주신 마음의 법이다.
죄진 사람들을 그냥 용서하고 방면한다면, 악한
인간의 속성 때문에 세계는 무법천지가 된다.
- 미국에는
마약 중독자가 창궐했다. 마약 관련자를 구금해도 감금할 곳이 없다. 훈계방면하다보니…
- 이
주님의 말씀은 사회법이 아니다. 성도 각 개인이 품어야 할 마음의 법이다.
- 구약성경에는
엄격한 법률이 있다. …. 그리고, 신약에도 엄격한 법이
있다.
.
마 21:12 성전 안에서 돈바꾸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
엎고 매매하는 내쫓았다.
. 유대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 등의
말씀으로 진노하셨다.
.
바울도, 이런 자는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
- 법의
문제는 법에게 맡겨라. 용서는 각자의 마음을 다스리는 마음의 법이다.
- 성도
마음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성도의 마음에 정죄하거나 미움이 있어서는 안된다.
- 마음에
정죄하고 미워하는 것이 있으면 결국 그 마음에 악이 스며든다.
. 영화, 악마를 보았다. 악마 처단을 위해서 추적하고 무섭게 벌을 집행한다. 그도 악마가 되었다.
** 23절
요약: 어떤 임금이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자( 10억불,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불가능한 빚이다), 그는
갚을 것이 없다,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줌… 그
종이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5000불)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목을 붙들고 빚을 갚으라, 그
동료가 엎드려 참아달라고 곧 갚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 동료를 옥에 가두었다. 임금이 그 소식을 듣고 노하여 그 종이 빚을 다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3. 용서는
가해자(범죄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법이다.
- 동물은
기억력이 뛰어나다. 학대받은 개는 모든 사람을 무서워 하고 멀리한다.
과거에 학대받는 기억의 감옥에 갇혔다. 그 나쁜 기억력을 치유해 주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란다”
- 사람의
기억력은 가장 뛰어나다. 어린이는 상처를 받으면 일생동안 기억나고 고통할 수 있다.
. 충격적인
사건, 폭행, 살인, 성폭력
등의 경우, 잊어 버리는 것은 너무 힘들다.
. PTSD(외상후
장애): 사람은 사건의 후유증으로 일생동안 나쁜 기억의 감옥에 갇혀 살 수 있다.
- 나쁜
기억/ 분노는 누에와 같다. 나쁜 기억/분노가 나를 칭칭 감싸서 나를 가두어 버린다.
- 탕감받았던
종이 다시 감옥에 갇힌 것은 임금이 가둔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가둔 것이다.
. 누에가
껍질을 벗고 나오듯이, 나를 감싸고
있는 나쁜 기억과 분노의 껍질을 벗어 버려야 한다.
. 용서는
분노/악몽의 감옥으로 부터 나를 자유케 하는 것이다.
. 용서는
나를 치유하는 것이다. 용서는 나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용서는
나를 구원하는 것이다.
* 그런데, 용서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 용서의
기술(The Art of Forgiving, Lewis B. Smedes):
용서를 이루어 내기 위해서 용서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용서를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고 연구해야 한다. 상대방을 연구하고, 나를 연구하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 내
마음에 자리잡은 미움을 제거해야,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참된 평화가 깃든다.
결: 이것은 세상의 법칙이 아니라 예수님의
법칙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실 때 “주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은 저희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우리의 1만
달란트의 빚를 탕감해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우리는 매일 실수와 오해, 갈등과 미움
속에 사는 것은 우리 일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생동안 주님의 용서가 필요하고, 서로를 향한 용서가 필요하다. 용서는 일생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이고,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본 정신으로는 용서를 실행할 수 없다. 주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경험하면 용서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용서라는 숙제를 가슴에 품고, 용서하기 애쓰고, 용서를 실천하여서 이 땅에서 천국을 이루기 바란다.